하이든은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을 읽지 않았다.
하이든은 나이가 들고서도 부모님이 부르던 옛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이든은 청결을 위해 Hainburg 시절부터 가발을 쓰고 다녔다.
하이든의 별명은 “세페를” (Sepperl)
아내는 내가 작곡가든 신발장이든 신경도 안써 일화
한 번은 하이든이 중요한 곡을 써야 해가지고 하인한테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시켰는데 헝가리에서부터 왔다는 사람들이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인은 손님들을 응접실에 두고 기다렸다. 하이든이 클라비코드에서 연주를 하다가 베이스를 꺼내들고 베이스를 퉁기기 시작하자 하인이 “곧 나오실 겁니다, 보니까 지금 벌써 바닥까지 (To the bottom) 다 가셨거든요.” 랬다고
아픈 하이든 아내 몰래 작곡 (선생님 안보고있을때 춤추기도 아니고…)
고별 일화
바리톤 일화
테레지아에게 꿩 진상 일화
하이든은 한번은 본인이 “세 마리의 들꿩을 동시에 잡았다” 고 했고 한번은 토끼를 쐈지만 꼬리만 맞혔는데, 그 옆에 있던 꿩이 대신 맞았고 토끼는 개가 쫓아가서 잡아 두 마리를 동시에 잡을 수 있었다” 고 말했다.
하이든의 말에 의하면 여가시간에 말 타기를 좋아했던 모차르트도 말 타면 불안해 했다고 한다.
주점 들어가서 그거 하이든 곡이냐? 하고 물어본 일화
하이든이 들은 ‘푸들’일화, 몇 두카트밖에 안되지만 그래도 이걸로 만족하고 써주시기를 부탁하자 하이든은 두카트를 돌려보내고 ‘나를 그리 형편없이 평가하시다니, 사과의 표시로 가터를 떠주셔야겠는걸요’ 하고 적어보냈다. 관리의 딸은 붉은색과 하얀색 실크로 가터를 떠서 위에 물망초 화관을 그려줘서 하이든에게 정말로 보내줬고, 하이든은 이 가터를 귀중품/보석과 함께 잘 보관해뒀었다고 한다. “The Sly and ever-helpful poodle”
모차르트와 하이든은 하이든이 영국에 가기 전 살로몬 (하이든 영국 매니저) 과 함께 밥을 먹으며 “나이도 적잖으니까 분명 오래 못 버티고 돌아오실 걸요.” 라고 모차르트가 말하자 하이든은 “하지만 난 아직 기력도 있고 건강하잖니.” 라고 답했다.
1791년 영국에서 하이든은 세 개의 살롱에서 열린 무도회를 봤다. 제일 높으신 분들이 있는 무도회 방은 미뉴에트만 추었지만, 하이든은 덥고 사람 꽉 찬 방도 못 견디겠고 미뉴에트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식이 아닌 폴란드식 미뉴에트에 악기는 바이올린 두 대와 비올론첼로 한 대뿐에 음악은 끔찍해서 15분만에 뛰쳐나왔다고 한다. 두 번째 방은 지하동굴 같았는데, 영국식 무도회였다. 음악은 여전히 끔찍했지만 바이올린 소리를 북소리가 덮어줘서 참을만했다고 한다. 제일 큰 방의 오케스트라는 견딜 만은 했지만, 대신 남자들이 테이블 옆에 술마시며 둘러앉아서 하도 시끄럽게 건배를 하고 있는 바람에 몇몇 춤추는 사람들은 음악을 듣지도 못하고 춤을 추고 있었다고 한다.
1791년 하이든은 허셜 박사를 만나 망원경울 구경했다.
하이든은 1791년 12월 쇼 씨와 식사를 하러 갔다가 여자들이 죄다 금색으로 ‘하이든’이라 수놓은 진주색 헤어밴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쇼 씨도 코트 깃에 비드로 하이든을 수놓아 있었다. 이때 보물과 ‘하이든에게 주는 것임’ 이라고 적힌 리라가 새겨진 코담뱃갑을 받았다. 그날 쇼 부인이 하고 있던 헤어밴드도 가지고 와 소중하게 보관했다.
영국에서 마리오네트 극도 봤다.
오스트리아 세관을 지나는 길 직원이 하이든에게 직업을 물었다. 하이든은 본인이 Tonkunstler 라고 답했고, 직원들은 Ton (점토) Kunstler (예술가) 니까 도공이라고 받아들였다. 하이든은 “정확하오.” 하고 하인을 가리키며 “그리고 이쪽이 내 도제요.” 하고 자기 하인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