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르작은 할아버지 대에 고향에 정착했고 Frnatisek 아버지가 물려받았다. 여관 겸 정육점, Gasthaus-Metzgerei. 아버지 쪽은 대체로 음악을 즐기는 아마추어 음악가들이었지만 어머니 쪽은그렇지 않았다.
드보르작의 애칭은 Tonik로, 동네 사람들은 다 드보르작을 Tonik이라고 했다. 10살 때 여관에 불이 나서 한동안 정육점에서 지내야 했지만 2년 뒤에는 다시 원래 집을 재견한 듯하다.
드보르작은 다섯 살때부터 아버지가 가르쳐 준 바이올린을 켜며 여관 손님들을 즐겁게 했다.
드보르작은 독일어를 못했다. 평생 외국어라고 생각했다. 독일어를 배우라고 삼촌한테 보내놓았더니 하필 삼촌도 음악을 좋아해서 (…) 음악만 실컷 배우고 왔다.
드보르작의 아버지는 더 큰 동네로 나가서 더 큰 여관을 운영하는 게 도움이 될 거라는 삼촌의 조언을 받고서 “The big inn” 을 열었으나 파산했다. 옆에 동종업이 문을 열었다.
또 독일어를 배우라고 다른 동네로 보내버렸다. 독일어만 하는 동네라서.
프라하로 온 드보르작은 오르간을 배웠다. 지원은 열심히 받았지만 독일어를 못 하는 것도 힘들었고 (오르간 학교의 공식 언어였다) 독일어 강좌를 추가로 들어서 극복했다. 비올라 연주자로 일하면서 용돈벌이를 했다. 고모 댁에 피아노는 없었지만, 돈 많은 친구랑 친구관계를 맺고서 친구의 책을 빌리고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물론 마음에 걸려 했던 듯하다.
공연은 보고 싶은데 입장료 낼 돈이 없어서 티켓 찾아 구걸하거나 어떻게든 몰래 들어가보기도 했다.
18살, 용돈이 끊겼다. 교회 오르가니스트에 지원했는데 까였다. 비올라 연주자로 군데군데 단원으로 벌어먹고 살며 드보르작은 오르간 다음으로 비올라를 좋아하게 됐다. 이 시기 드보르작은 밴드와 함께 프라하의 수많은 레스토랑에서 연주를 하고 다녔다. 이 후 14년동안 드보르작은 계속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정말 재미없게 살았다. 매일 아침 밴드와 리허설, 저녁에는 밴드와 공연, 그 사이 쉬는 시간에는 작곡 하고 곡 공부하고, 과외해주면서 돈벌어먹었다.
이 중간에 체코 국립극장이 생겨났다. 드보르작의 오케스트라가 통째로 극장에 합류하며 드보르작은 1858년 리스트 지휘 아래, 1863년에는 바그너 지휘 아래서 공연도 했었다. (바그너 곡들을). 스메타나가 극장 감독이 되면서 알게 되기도 했다.
이 시기 드보르작은 64년, 오케스트라 단원이자 친구+4명과 함께 살게 된다. 65년에는 다시 고모 댁으로 들어갔다.
드보르작은 피아노 선생님이 됐고 언니한테 구애했으나 까였다. 그래서 동생과 73년에 결혼한다. 4년 뒤 언니 쪽도 결혼했고 형님 (백작이었다) 과 드보르작 그리고 자매 넷이서는 다 잘 지냈다고 한다. (휴!)
드보르작은 교향곡 1번을 독일에 무슨 공모전에 냈으나 상도 못 받고 곡도 못 돌려받았다. 23년에서야 발견됐는데, 학생이 몇년 뒤 교향곡 악보 잃어버리고 나서 어땠냐 물어보자 드보르작이 말하길 “앉아서 다음 교향곡 썼지.” 그래서 드보르작의 2번 교향곡이 1번이라 매겨져 있고 그렇다… 드보르작 교향곡 1번의 불협화음은 Zlonice 의 종 두개 중 하나가 당시 약간 금이 가 있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한다.
드보르작의 선율에 대해서 브람스: “그 녀석은 우리 누구보다도 선율 아이디어가 풍부해. 그 녀석이 쓰다 남겨놓은 선율 가지고 우리였으면 주제선율로 삼고도 남았을걸.”
드보르작은 1873년, 장인어른이 죽고서 (…) (이 시점 드보르작은 1개월 전에 약간의 성공을 거뒀다) 결혼했다. 결혼 후 5개월도 안 되는 시간만에 첫애가 생겼다 (…) 이 날짜는 드보르작 부모님이 결혼한 다음날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드보르작의 딸은 드보르작 부부가 결혼한 날과 같은 날에 결혼했다.
드보르작의 아내에 대해서 많이 알려진 바는 없고 별 갈등 없이 살았던 듯하지만, 금전 감각이 있고 물질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을 확률이 좀 있다고 한다.
드보르작은 St. Adalbert’s church 에 고용됐다. 상사가 드보르작의 선생이자 드보르작 친구의 아버지였던 건 비밀이 아니다.
드보르작은 신실한 가톨릭이었다. 곡 끄트머리에는 Bohu Diky (주님께 감사드리며) Chvala Bohu (주님의 은총을 받아) Zaplat pan Buh (주님이 보답하실 것) 이런 것들을 적어놓았다고 한다.
자연을 좋아했다. 무척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프라하에서는 공원의 나무와 새로 만족해야 했지만. 천성이 소박하고 겸손한 사람이라서 누가 찬사를 잔뜩 적어보내면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무슨 반신에게 편지를 보내듯 보내주셨는데 전 영영 그런 사람이 될 리가 없으며’ ‘전 그런 과장된 포장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소박한 보헤미아 작곡가입니다’ 하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