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남1녀 중 막내. 러시아식으론 세자르 안토노비치고 세례명?은 세자리우스(카이사리우스?) 벤야민 큐이인듯
- 어린 세자르는(15살) 쇼팽의 작품들에 푹 빠졌지만 가족들은 그리 잘사는 집안이 아니었고 작품집은 물론 빈 오선지도 아주 비쌌음. 해서 세자르는 그냥 맨종이에다 오선을 죽죽 그어 쇼팽 마주르카를 모두 베껴 소장했다고 (이후로도 큐이는 평생 종이를 매우 아껴 썼다고 함)
- 큐이는 평생 담배를 피지 않았음. 담배냄새를 풍기는 것도 용납 못했지만 시가만은 예외였다고. 이건 아마 어릴 적 무료로 성심성의껏 음악을 가르쳐줬던 존경하는 스승 Moniuszko가 내내 시가를 달고 살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함
- 어린 세자르는 몸이 약하고 조용하고 내향적이었음. 음악 외에도 그림 그리는 걸 아주 좋아했고 또 잘 그렸다고
- 학교 성적은 좋은 편이었음. 러시아어, 프랑스어, 리투아니아어, 폴란드어를 할 수 있었음
- 큐이가 16살에 상트 군사공학학교에 4학년으로 입학했는데 당시 여느 군사학교처럼 똥군기같은거 있어가지고 4학년들은 두 학년 상급생들을 위해 공책 복사해 주고 야간수업 촛불 사다주고 가방들어주는등 여튼별좃같은거다시켰고 말을 듣지 않으면 맞기도 했음ㅁㅊ 다행인건지 큐이는 이런 괴롭힘들은 피해갈 수 있었는데 대신 음악적으로 뽑아먹혔다 함(유명한 오페라 곡을 치게 시킨다던지 상급생들에게 로망스를 가르쳐주고 반주해주는 등)
- 볼쇼이 극장의 이탈리아 오페라 시즌엔 큐이는 동급생 몇명과 함께 거의 매주 주말 극장을 찾았다고(토요일 야간 수업이 새벽3시에 마치는데도)
- 학교 졸업한 큐이는 연봉 300루블을 받았고 이걸 아주 아껴서 써야 했음(주로 극장에 가던가 좋아하는 그림의 복제품을 사는 데 썼음) Krylov: '우리의 생활은 지극히 소박했다. 큐이는 당시 수입으로 산 잼을 차에 곁들여 마시는 걸 좋아했고, 이것이 우리에겐 호화로운 선물이었다. 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1856년에 20살의 발라키레프 만남. 아주 친해져서 2~3년동안 거의 매일 볼 정도였다고
- 큐이와 발라키레프는 함께 음악의 형태와 구조를 뜯어보며 공부를 했고, 피아노 앞에 앉아 베토벤, 슈만, 슈베르트, 멘델스존 등의 곡들과 글린카의 오페라 서곡을 포핸즈로 연주하곤 했다
- 1856년 6월 22일 소위로 진급한 큐이는 공학 실무를 위해 Kronstadt라는 군사도시로 갔고 이 도시엔 진짜 할 게 없었음. 큐이→발라키레프: '여긴 아무도, 아무것도 없어. 괜찮은 호텔도, 제과점도, «Musical Harold»를 읽을 수 있는 상점도, 아무것도. 좋은 점이라곤 딱 세 가지 있지. 1) 마부, 2) 도시 공학 사무관이 칼을 차지 않고도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고, 3) 아이스크림, 그것도 아주 많이 먹을 수 있어.'
- 아카데미에서 군학도 계속 배웠음. 미적분학 교수님은 로마 역사를 진짜 좋아했는데 하루는 그 교수님이 큐이에게 12점 만점에 9점을 주려 함. 그때 친구 Struv가 대뜸 교수님에게 '재고해 주십시오, 각하, 그는 카이사르[=세자르]입니다' 했고 교수님은 '카이사르? 너는 위대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왔단 말이냐?' 하더니 허리굽혀 인사하곤 12점 만점을 주심ㅋㅋㅋ 이후 시험날에 큐이는 자신감 있게 답을 써 냈는데 완벽한 답은 아니었고 역시 12점을 주심. 시험 후에 따로 '부모님께 자네 이름을 카이사르라고 지어 주신 데 감사 편지를 쓰게, 그렇지 않으면 12점은 없어'라 하셨다고
- 어린 시절부터 날카롭고, 자립심 강하고, 회의적인 면도 상당히 있었지만 아름다운 것에 있어서는 대단히 수용적인 사람 (근데 그 아름다움<의 기준이 꽤 빡쎄지않나,,)
- "차갑고, 딱딱하고, 완고해 보이는 인상, 하지만 그것이 그의 귀중한 마음씨와 감정들을 가리지는 못했다"
- 1857년 18살의 무소륵스키가 합류함.ㅤㅤㅤㅤㅤㅤㅤㅤ큐이: '우리는 공부할 곳이 없었고(당시엔 음악원도 없었다) 우리의 독학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위대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닥치는 대로 연주했고, 기술적, 창의적 측면에서 포괄적인 비판과 분석을 내놓았다. 그때 우린 젊었고 비판은 혹독했다. 모차르트와 멘델스존은 경멸했고, 당시 아무도 듣지 않던 슈만을 멘델스존과 대조했다. 리스트와 베를리오즈에게는 빠져 있었고, 쇼팽과 글린카는 우상화했다. 열띤 토론이 있었고 (그동안 잼을 곁들인 차 4-5잔을 비우기도 했다) 음악 형식, 성부 음악, 특히 오페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 1858년 10월 19일 Dargomizhsky의 성악 레슨 학생이었던 말비나 밤베르크와 결혼함.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스타소프→발라키레프: '큐이는 한 달 간 편지를 14통을 썼는데, 그 중 7통이 마틸다[말비나]에게 쓴 거야. 그러니까 그는 실무 나가 있는 내내 아무것도 안 하면서 편지를 쓰거나 받기만 했다는 거지.'
- 슈만이 했던 것처럼 아내의 성 이니셜(BAmBErG), 자기 이니셜(C. C)을 따와서 곡을 짓기도 했음
- 무소륵스키는 노래를 꽤 잘 불렀으며 1859년 큐이가 작곡한 실내 공연용 단막극 오페라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고. 연기도 반응이 좋았다고 함
- 서클에서 발라키레프, 큐이는 선배 느낌, 이후에 합류한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보로딘은 후배 느낌이었다고 (림스키 회고)
- 1861년 큐이는 공학 교사로 일하고 있었지만 벌이가 많지는 않아서 아내와 함께 집에 공학사관학교 입학을 준비하는 기숙생들을 받기도 했음. 기숙생들은 1년 동안 집에 묵으면서 산술, 대수학, 측량법, 항공 공학, 역사, 지형학, 외국어 등등을 배웠다고